20세기 최고의 마에스트로, 30여년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카라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1908년 4월5일 출생, 1989년 7월16일 사망
1929년 데뷔. 모차르트테움 대강당 연주회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니 제4대 상임지휘자
1956년~1989년 베를린 필하모닉 종신 예술감독
1956년~196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
1957년~1964년 빈 슈타츠오퍼 예술감독
베를린 필하모니는 1882년 한스 폰 뷜로에 의해 창설되었다. 1895년에서 1922년까지는 보스턴 교향악단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지휘자였던 아르투르 니키슈가, 1933년부터 1954년까지는 푸르트벵글러가, 그 뒤에는 카라얀이 지휘를 맡았다. 1933년 푸르트벵글러가 37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의 지휘를 맡게 된 것은,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유태계나 나치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던 때에 순수 독일 사람이면서 이미 독일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에 이어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니의 제4대 상임지위자가 되었는데, 자본주의의 흐름과 타고난 음모가적 기질이 적절히 융합되어 20세기 후반 최고의 지휘자 반열에 오른 그를 혹평하여 코카콜라, 혹은 깡통식품쯤으로 비유하기도 하곤 한다. 물론 콜라나 캔이 주는 편의성과 대중성이란 측면에서의 공헌이란 대단한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사꾼이라 비아냥도 들었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는 때로는 소름이 끼칠 정도라 평하는 사람이 많다.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정확하게 조율된 복잡한 시계 태엽 장치의 톱니 바퀴들이 정확하게 맞물리며 돌아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조율, 통일된 전체성. 마치 완벽주의자의 결벽처럼 깨끗하다.
1908년에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지휘봉을 잡은 것은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카라얀은 풍부한 음악적 신화와 더울어 심심치 않게 여성들과의 염문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휘두르는 지휘봉이 그리는 선은 시각적으로 청중을 홀리는 마성을 지니고 있어 특히 여성 청중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고, 카라얀 열풍은 마침내 ‘카라얀 마니아’를 만연시켰다.
무대에 설 때가 아니면 골덴 바지나 청바지에 검은 셔츠 바람으로 나타나고, 외국으로 갈 때는 이탈리아 출신 이발사를 대동하는가 하면, 자신은 이탈리아산 스포츠카 페라리를 몰면서 비서가 운전하는 롤스로이스는 자신을 뒤따르게 하고, 가까운 곳은 혼자 자가용 비행기를 조종하고 다니는 등 언제나 화제를 몰고 다니는 슈퍼스타 카라얀 덕분에 베를린 필하모니는 더욱 유명해진 듯 하다.
카라얀의 인격이나 전력이야 어떤 문제가 있었던지 간에, 그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은 그 어떤 오케스트라도 따라갈 수 없는 놀라운 연주능력을 보여주었고, 카라얀은 단원들에게 스튜디오 녹음과 순회연주를 통해 들어오는 막대한 부를 통해 보답했으며 그 이면엔 항상 카리스마로 통하는, 악단을 휘어잡는 심오한 독재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 본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찌에 자진해 참여했고 남들 한번 하는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
30년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고, 자신의 라이벌에겐 가혹한 처벌자로, 추종자들에게는 제왕으로 군림했던 사람. 코카콜라나 참치캔 만큼이나 유명했고 음반 산업의 총아로 페라리 고급 스포츠카를 애용하고 지중해 연안 최고 별장을 소유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가이자 대단한 재력가. 한 개인이 일구어낸 우리시대의 우상.
하지만 지휘자로서 카라얀이 평생동안 갈구했으나 영원히 얻지 못한 것, 능가하고 싶었으나 그에 이르지 못한 카랴얀의 빛과 그림자를 이루는 유일한 인물이 있었으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였다.
그 자신이 결코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던 명 지휘자의 한 사람이다. 이것은 벵글러가 지니고 있는 예술적 깊이와 인격의 풍모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무명 시절 푸르트벵글러의 연주를 듣기 위해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연주회장을 들락거렸지만 그의 사후엔 단 한 차례도 선배 지휘자였던 푸르트벵글러를 위한 추모 연주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54년 11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사망 후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대권을 잡았으며, 1956년 베를린 필 종신 음악감독 계약을 체결하였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카라얀이 상임지휘자가 된 것은 당시 카라얀이 대세였다 뭐 이런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사정을 보면 꼭 그러지만은 않고 복잡한 역학 관계가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언론과 음악계에서는 카라얀 뿐만 아니라 첼리비다케,요훔,뵘,카일베르트 등 다양한 인물들이 비중있게 거론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필 단원들도 여러 지휘자들에게 대해 열띤 논의를 벌이고 있었다.
푸르트벵글러의 사후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의 생전에 추진되었던 미국순회공연의 연주를 자신이 맡는 대신 베를린 필의 종신 지휘자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고, 베를린 필은 그의 협박에 못이겨 카라얀과 종신지휘자 자격으로 계약했다.
그가 1956년 베를린 필을 이끌고 처음 미국 순회 공연을 시도했을 때 미국 시민과 언론은 카라얀과 베를린 필을 외면했다. 전직 나치 당원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공연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잘 알려진 이야기도 있다.
1989년 내가 대학 새내기때 잘츠부르크 근교 자신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그날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대성당 광장에서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개회 연주로 거행될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를 오전동안 연습한 뒤였다고 한다. 20세기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는 지금 아니프 마을 오르트스프리베호프 묘지에 묻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옛 사람들의 말이 떠 오른다.
사람이 하는 모든 영역에서도 다 똑같을거란 생각이 든다. 어느 분야든 자기 세계에서 최고가 되기 위한 몸부림, 애욕, 노력과 헌신, 그리고 그것과 동반하는 좌절과 분노, 질투, 패배, 열등, 슬픔 등 이 모든 감정마저 사랑하고 안고 간 이 땅의 수 많은 넋들을 잠시 돌이켜 본다.
카라얀 지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카라얀)
